'주정뱅이 천사'는 패전 후 혼잡하고 삭막했던 일본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폐수 처리도 안 되는 열악한 환경에 사람들은 결핵과 장티푸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마을의 오염된 웅덩이는 전후 일본 사회가 처한 구렁텅이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야쿠자인 미츠나가는 결핵에 걸린다. 나쁜 짓을 하면 벌 받는다 하기에는 야쿠자로서의 범죄행위가 나오진 않는다. 이 영화에서 야쿠자는 범죄를 의미하기보다 전후 일본 사회가 벗어나야 하는 혼잡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비유적으로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악과 선을 쉽게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나쁜 짓을 하지 말자는 도덕적 교훈과는 거리가 멀다.
미츠나가의 폐렴 증상이 심해진 직후 그는 해변가에서 관을 부수는 꿈을 꾼다.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동기가 무의식 중에 꿈에 투영된 것이다. 관 속에 갱스터로 위상을 높였던 과거의 자신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미츠나가 스스로도 죽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야쿠자의 삶을 청산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이 자신을 쫓는 모습은 그가 악으로 대표되는 갱스터의 삶에서 탈피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에게 있어 갱스터는 명성이자 자존심이며, 무엇보다 의리의 가치를 의미한다. '주정뱅이 천사'에서 갱스터는 사회의 부조리와 악, 벗어나야 하는 암울한 분위기를 의미함과 동시에 미츠나가에게는 의리라는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되면서 양면성을 가진다. 따라서 미츠나가의 꿈은 그가 의리의 가치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낸다. 미요를 찾으러 온 새로운 권위자 오카다에게 무릎을 꿇은 이유에도 사나다와의 관계가 일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에게 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자신의 명성과 체면을 지키기 위한 것도 있으나, 이는 갱스터라는 집단 내 끈끈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의리를 제 1의 가치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큰형님을 찾아갔을 때 자신을 버릴 목숨으로 취급하며 관계를 돈으로만 치환해버리는 모습을 보며 환멸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인생이 헛되었음을 안 인물의 심리는 어땠을까? 끝까지 믿었고 모든 것의 바탕이 되었던 가치가 거짓되었음을 알게 된 이후 허무해진 그에게 명성과 자존심은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꽃값을 요구하며 이전과 태도가 달라진 꽃집 주인에게 화를 낸 점도 자존심이 상해서라기보다 배신에 대한 분노를 분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 오카다를 죽이기 위해 찾아간 것은 자신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의리의 가치와 정반대에 있는 갱스터, 즉 악을 처단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마츠나가도 야쿠자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자칫 그의 신념이 야쿠자를 미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극 중 미츠나가가 죽긴 했지만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위한 스스로의 결정이었으므로 도덕적인 승리라고 평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서 미츠나가가 왜 큰형님이 아닌 오카다를 찾아갔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자존심이 상한 것에 대한 분노로 감성적으로 대응한 것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악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큰형님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자신의 건강상태와 갱스터 구조를 보면 큰형님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상대적으로 무방비에 있고 악의 중심부에 근접한 인물을 제거하는 것이 이성적 판단이다.
미츠나가는 갱스터라는 악의 무리에 있었으나, 그 집단 내 어느 인물보다 의리의 가치로 살았다. 또한 두려운 건 두려워하고 외면하는 과정을 거치는 인가다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살아남기 위해 갱스터 삶을 벗어나려고 시도도 했다. 따라서 미츠나가는 사실 사나다가 그토록 강조했던 이성적 존재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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