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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산문, 칼럼 등등)

허망하다

by 문득이의 바람 2022. 1. 24.

 무릎에 닿은 풀은 물기에 젖어있다. 손가락 하나하나 사이마다 만져지는 질퍽한 흙을 씻어낼 수가 없다. 일어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회색빛 하늘은 나를 짓누르고, 일어나고 싶어도 진흙탕에 얼룩진 다리를 보고 싶지 않아 멍하니 넘어져있다. 허허벌판 위 매서운 비에 한풀 꺾인 풀들도 처음엔 완강하게 버텼으리라. 끝까지 이겨내고 싶다는 강인함과 생명력으로 밝게 빛났음이라. 허나 기나긴 싸움에 내면에서 유혹이 시작된다.

 

  '한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 돼, 넘어지는 게 아니라 쉬어가는 거야. 다시 일어날 수 있어'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스스로를 항한 믿음이 아니라 굴복이었음을 알아야 했다. 천사로 둔갑한 악마의 손짓이었음을 알아야 했다. 그 끝에는 절벽밖에 없음을 알아야 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타협을 하고 변명하고 싶었던 거겠지. 패배를 인정할 자신이 없었던 거겠지.

 그들은 그렇게 무너졌다. 힘이 풀린 다리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아까의 의지는 빗물과 함께 흘러내려간다. 손을 뻗어도 빗물은 마디 사이로 매몰차게 빠져나간다. 천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소로운 미소로 나를 억누른다. 패배를 확신시키는 경멸스러운 웃음소리에 내 울음은 파묻힌다.

  '그래, 모든 게 내가 만들어낸 헛된 희망이니 누굴 탓하리라.'

 

 울음소리가 자조의 웃음소리로 바뀐다. 비가 그쳐도 눈물은 나를 타고 내려와 젖은 몸은 마를 수가 없다. 빛나는 햇빛도 눈물 속에서 반사되어 나를 다독일 수가 없다. 화사한 하늘, 처절한 웃음소리만이 귓가에 울려퍼지며 그렇게 며칠을 그치지 못했다.